통일

3·1운동 뒤에 ‘몽양’ 있었다

코코와채송 2008. 5. 2. 02:34
3·1운동 뒤에 ‘몽양’ 있었다
한겨레 한승동 기자
» 1946~7년 무렵의 몽양. (위에서 왼쪽) 1947년 7월 몽양 장례식에 모여든 군중. 보기 드문 애도 인파였다.(위에서 오른쪽) 1946년 5월에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슈티코프 상장(가운데) 등 소련 쪽 대표들과 악수하는 몽양.(아래)
» 이정식 교수의 ‘몽양 여운형’
이정식 교수의 ‘몽양 여운형’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인 1919년 3·1운동을 촉발시킨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몽양 여운형이라면 사람들이 믿을까. 여운형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억은 광복 전후부터 그가 1947년 7월 암살당할 때까지 몇년간의 활동에 관한 것이 거의 전부였다.


독립청원서 작성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
파견 강덕상의 ‘여운형…’ 방대한 자료
균형적 해석

지난해 12월 초 국내에 번역·출간된 재일동포 역사학자 강덕상 시가현립대 교수의 <여운형 평전 1>은 방대한 자료들을 통해 기존 연구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강 교수는 자신이 “평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독립운동사론”이라고 한 그 책에서 독립운동 세력이 3·1운동과 밀접하게 얽혔던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 강화회의에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자세하게 논하면서 몽양의 역할에 대해 포괄적으로 언급했다.

은사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와 함께 한국민족운동사를 천착해온 이정식(77)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경희대 석좌교수의 <몽양 여운형>(서울대 출판부 펴냄)은 <여운형 평전 1>과는 또 다른 각도로 몽양의 실체에 다가가면서 그것이 이룩한 성취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요소들을 보탰다. 특히 3·1운동이 일어나는 데 몽양이 직접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자료들을 담았다.




이에 따르면 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 쪽 승리로 끝난 1918년 11월28일 당시 상하이에서 기독교 전도사로 교민친목회(그 다음해 초 교민단으로 바뀌고 몽양이 단장이 됨) 총무를 맡고 있던 몽양은 파리 강화회의를 피압박민족 해방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강조한 주중 미국대사 내정자 찰스 크레인의 연설을 듣는다. 그 자리에서 크레인을 직접 만난 몽양은, 그해 여름 상하이에 와 있던 8살 아래의 와세다대 출신 장덕수 등과 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고 신한청년당을 결성한 뒤 일제의 탄압을 피해 톈진으로 망명한 김규식을 불러 강화회의에 보내기로 했다. 김규식이 상하이를 출발한 것은 1919년 2월1일. 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려는 노력은 여러 갈래로 경주됐으나 오직 김규식만 성공했다. 파리행을 토의할 때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쪽에서 서울에 사람을 보내 국내에서 독립선언을 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조선이란 망한 나라가 존재감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발언권도 없고 누군지조차 모를 자신에게 회의 참석자들이 관심을 기울일 리 없다는 게 이유였다.

이정식 교수는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씨를 만나 책에 인용한 그 얘기를 확인했는데 김규식 평전까지 썼던 자신의 뒤늦은 깨달음을 탓하면서, 도쿄와 서울에 전달된 그 말이 3·1운동을 불러일으켰다고 밝혔다. 기독교·천도교·불교계 지도자들이 3·1운동을 조직하고 주동하게 만든 직접적인 동기는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다. 그런데 2·8선언 직전 주동자였던 최팔용을 움직인 것은 상하이에서 도쿄로 잠입한 장덕수였다. 장덕수를 일본과 조선에 파견한 것은 몽양이었고, 거사 계획을 알리고 김규식 여비를 모금하는 것이 장덕수의 주요 임무였다.

이정식 교수는 중국 5·4운동까지 촉발한 3·1운동 발발 이후 전도사 여운형은 독립운동가 여운형으로 위상이 바뀌며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데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이 교수는 사람들이 광복 뒤의 일들만 가지고 몽양을 평가하지만 그 기간은 “그의 60평생의 극히 짧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며, 50여 년에 걸친 자신의 한국민족주의운동사 연구 “거의 모든 장면”에서 몽양과 마주쳤다고 강덕상 교수와 꼭 같은 말을 했다. 그는 강 교수의 <여운형 평전 1>이 “자료의 방대함과 서술의 세밀함에서 너무나 충격적이었다”며, 그 때문에 자신은 몽양의 삶 전체를 추적하는 전기를 쓰기보다는 “나름대로의 해석” 쪽으로 집필 방향을 바꿨다고 말했다. <몽양 여운형> 역시 800쪽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이다. <여운형 평전 1>은 왜곡되거나 무시당한 몽양의 일생과 시대상을 구체적 사실들을 통해 바로잡는다는 일념으로 일로매진했고, <몽양 여운형>은 사실들의 중층적 맥락을 섬세하게 살피면서 균형 감각을 유지하려 애썼다. “서재필, 이승만, 김규식 등을 연구하여 전기를 쓰기도 했고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연구한 바 있지만 여운형을 가장 좋아한다”는 이 교수는 몽양의 사상이 ‘모호한 팔방미인’이라거나 그를 ‘공산주의에 도취된 줏대 없는 기회주의자’로 보는 주류적 시각에 대해서는 그에게 맞지 않는 “사상적인 틀을 무리하게 맞춰보려고” 한 결과일 뿐 사실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