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퍼옴.[아침햇발] 국화꽃을 올리며 / 여현호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를 찾았다. 봉하마을은 못 가고, 조계사로 향했다. 일요일 저녁, 조문을 기다리는 줄이 무척 길다. 줄에는 국화꽃을 든 이가 여럿이다. 봄밤 화사하게 차려입은 아가씨들도 있고, 노부부도 있다. 등산복 차림 중년과, 검은 넥타이까지 갖춘 30대도 앞뒤로 섰다. 무엇이 이들을 여기 함께 세웠을까.
노무현은 촌놈이다. 집 뒤 봉화산에서 칡을 캐고 진달래도 따고 발가벗고 물장구도 치며 놀던, 우리네 많은 사람과 다를 바 없던 시골아이였다. 입학금이 없어 중학교도 포기하려 했고, 고구마 순을 팔아 생계를 잇던 부모를 보며 반드시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결기도 세웠다. 그처럼 보통고시, 곧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을 거쳐서라도 고등고시에 도전하겠다던 고졸의 가난한 시골 수재들이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중 하나였던 내 외삼촌은, 뒷바라지한 동생의 고시 합격을 자랑스러워했던 세무공무원 노건평씨의 직장 동료이기도 했다.
따지자면 그 말고도 출세한 촌놈은 많다. 그는 다만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변호사 개업 초기, 합의만 되면 변론도 필요없는 사건에서 별일도 않고 수임료만 챙긴 그를 원망하던 한 아낙의 눈길을 평생의 부끄러움으로 간직하던 사람이었다. 부끄러워하는 데서 그치지도 않았다. 브로커와의 사건 거래를 고민하던 그는 문재인 변호사와의 동업을 계기로 커미션을 일체 끊었다. 고문받은 대학생들을 보며 가졌던 부끄러움으로 민권운동에 뛰어들었고, 고급 승용차 안에서 상계동 철거민들을 봤던 초선의원의 부끄러움과 절망감으로 정치인이 해야 할 역할과 책임을 고민했다. 뻔뻔하게 뭉개고 버티는 게 어떤 이들에게 무기라면, 그에겐 부끄러움이 힘이었다. 정치적 계산 따위는 하지 않으려 했던 ‘바보 노무현’은 그렇게 빚어졌다.
어둠 속에서 얘기 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온다. “우리 살아 있는 동안 그렇게 열정을 바칠 사람이 또 나올까?” 30대인 듯한 목소리가 친구에게 묻는다. 대답을 하는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있다. 한 정치인의 죽음 앞에 사람들은 그렇게 마음 한 자락씩을 담아 모였다.
줄은 절 마당을 몇 바퀴나 겹쳐 돈다. 마당이 그득하다.
세상의 마당에서 그는 수모를 당했다. 쉼 없이 사람을 죽였던 명 태조 주원장이 만든 형벌에 정장(廷杖)이 있다. 자금성 오문 앞 마당에서 환관 주재로 여럿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신이나 지식인들이 볼기와 넓적다리만 드러낸 채 매질을 당하는 형벌이다. ‘선비는 죽일 순 있어도 욕을 보일 수는 없다’(士可殺 不可辱)고 했던가. 지조 있는 이에게 모욕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다. 하물며 그는 꺾일지언정 휘어질 순 없는 사람이었다. 정치 역정이 그러했다. 법률적 혐의 입증과는 별 상관없는 검찰의 망신 주기, 멋대로 사실을 무시하거나 과장하는 일조차 서슴지 않는 언론의 물어뜯기 앞에서 그는 싸우고 맞서다 끝내 지쳤을 것이다.
국화꽃을 들고 영정 앞에 섰다. 향로엔 그가 마지막으로 찾았다는 담배가 몇 대 걸쳐 있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느냐고 그는 말했다. 가르는 것이 부질없으되, 그가 죽어 자신을 지키려 했다면 살아 그 뜻을 떠올리는 것 또한 남은 이들의 몫이다. 삼가 고개를 숙인다.
돌아오는 길, 시내는 시동을 건 채 인도와 차도 사이를 성곽처럼 가로막고 선 전경차들로 덮여 있다. 차창으로 매캐한 매연덩이가 뿌옇게 쏟아진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에 이어 죽은 기준의 절명시를 떠올린다. “해 떨어져 하늘은 칠흑과도 같고, 산은 깊어 골짜기가 구름과 같구나.” 화해와 용서는 아직 멀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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