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처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예회 비슷한 행사를 열었을 때 가 본 적이 있다. 한 순서에서 1~3학년 아이들 20여 명이 무대에 늘어서서 노래를 불렀다. 소말리아 전통 민요라고 했다. 그 노래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정말 천상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 같았다. 순진한 어린이들이 주저주저하며 조심스럽게 내는 목소리들은, 슬픈 듯 하면서도 흥겨운 가락과 잘 어울려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자아냈다. 그 장면을 녹화해 두지 않은 게 두고두고 후회되었다.
한동안 이 뜻도 모를 소말리어 노래의 조각들은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노래는 검색을 통해 찾아봤으나 나오지 않았다. 그 뒤로, 소말리아에 관련한 소식을 들을 때면 항상 이 노래가 떠오른다. 물론 동시에 떠오르는 다른 장면도 있다. <포린 폴리시>에서 보았던, 내전으로 벌집이 된 건물 앞을 지나가는
모가디슈의 두 여인 모습이다.
한국인이 소말리아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해적 때문일 것이다. 한국과 관련한 배가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되는 일이 잇달아 발생하고, 그 때문에 상선이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도록 청해부대를 파견한 일이 근래에 우리가 소말리아와 얽히게 된 계기들이다. 그 전에는 영화 <블랙 호크 다운>에 등장하는 소말리아 정도일까.
국제 공인 '실패 국가'소말리아는 국제 사회가 공인하는
실패 국가(failed state)다. 국가로서 기능을 유지하는 데 실패하는 나라가 드물지는 않지만, 소말리아는 그 중에서도 최악이다. <포린 폴리시>가 지난 2010년 6월에 발표한 세계의
실패 국가 리스트에서 소말리아는 177개 국가 중에서 1위를 차지했다. 2008년 이래 3년째 1위다.
소말리아에는 통치권을 행사하는 합법적 정부가 존재하지 않거나 있더라도 영향력이 거의 없으며, 치안 유지나 국민 보호, 사회 서비스 같은 국가 기능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 무정부 상태의 혼란이 지배한다.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가 있긴 있지만, 정부의 통치력이 미치는 영토는 대통령궁을 중심으로 한 수도 모가디슈의 몇 블록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통제가 되지 않는 군벌들이 나누어 장악하고 있다.
폭력과 혼란이 질서와 안정을 대치하고 있는 나라에서도 사람은 살아야 한다. 그리고 소말리아에서 해적은 매우 중요한 산업이다. 내전과 혼란으로 인해 소말리아는 경제적으로도 최악이다. CIA의
World Factbook에 따르면 소말리아의 1인당 GDP는 약 600달러로 추정된다. 국민 한 명이 하루에 2천원도 벌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해적들은 다르다. 낮은 등급의 해적이라도 1년에 2만 달러 정도는 충분히
벌어들인다. 일반 국민의 소득보다 30배도 넘는 수입이다. 소말리아에서 해적들이 엘리트로 간주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2009년에 소말리아가 해적 산업을 통해 벌어 들인 돈은 8천900만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때문에 소말리아 해적 산업은 계속 확장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도 그렇고 감행의 무모함에서도 그렇다. 아래 지도와 그래프를 보면 소말리아의 해적 산업이 연도 별로 어떻게 확장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소말리아의 해적은 2007년에 세계 전체 해적 사건의 17%에 지나지 않았다. 2009년에는 절반 이상이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벌어졌다.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상황이다.
도대체 아덴만과 인근해에서 왜 이렇게 해적이 활개치게 된 것일까. 우선 소말리아의 지리적 조건이 해적 산업에 유리하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다. 소말리아는 아프리카 대륙 국가 중에서 가장 긴 해안을 가진 나라다. 또 인근의 아라비아 반도 덕분에 코 앞을 지나는 배들의 수효도 많다. 소말리아 연근해를 왕래하는 배들은 한해 2만 척이 넘는 것으로 집계된다. 한 마디로 '물 반 고기 반'의 황금 어장인 것이다. 물론 어업이 아니라 해적업의 측면에서 그렇다.
그러나 이런 점만으로 소말리아가 해적의 소굴이 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배경이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소말리아의 해적을 대할 때 흔히 간과하거나 무시되는 점이기도 하고, 서구의 매체들이 애써 외면하는 점이기도 하다.
외국 침탈에 대항하면서 시작된 해적 산업1980년대에 내전이 시작된 이래, 소말리아에서는 제대로 된 단일 통치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주권을 수호할 강력한 권력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은 소말리아가 무주공산(無主空山)인 것처럼 보이는 결과를 낳았다. 외국이 소말리아의 영토를 마음대로 들어가기는 어렵지만, 바다는 달랐다. 외국 배들은 주인이 없는 소말리아 영해를 마음대로 드나들며 물고기를 잡고 자국에서 처리하기 곤란한 독성 폐기물들을 쏟아 버렸다. 무주공해(無主空海)라고나 할까.
과거에 소말리아에서 어업은 중요한 산업이었다. 소말리아 국민들은 전통적으로 해산물을 많이 소비하지 않으므로, 잡힌 해산물은 대부분 외국으로 수출되었다. 이 때문에 유럽 국가들과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소말리아의 어업에 투자하고 어족 자원을 확보하느라 경쟁했다.
그러나 내전으로 나라가 피폐해지면서 어업 인프라는 모두 깨지기 시작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외국 배들이 경제수역권 안에서 마음대로 고기를 잡고 폐기물을 쏟아 버리면서 고기가 씨가 마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전에 바쁜 정부는 이를 챙길 여유가 없었고, 해안 경비대도 없는 소말리아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국제개발처가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2003~04년에 외국 어선들이 소말리아 해역에서 불법으로 잡아 간 참치와 새우는 1억 달러어치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었다.
90년대 초부터 소말리아 어부들은 나라가 지켜주지 못하는 바다를 스스로 지키러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단체를 조직하고 어선을 AK로 무장했다. 그리고 자국 바다에서 불법 행위를 하는 외국 선박들을 응징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지금 국제적인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는 악명 높은 소말리아 해적의 출발이다. 해적 조직들이 '자원 해안 경비대(National Volunteer Coast Guard)' 같은 이름을 달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된 자발적 해안 경비는 언젠가부터 공세적인 해적질로 바뀌었다. 고기를 잡는 것보다 사람을 잡는 편이 더 수익이 된다는 점을 소말리아 어부들이 깨닫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소말리아 해안을 장악하고 있는 군벌들이 어민들의 해적 활동을 지원하고 이를 통한 수익을 주요한 재원 확충 사업으로 삼기 시작했다는 점도 관련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보면, 대체 누가 해적인지, 누가 먼저 해적질을 시작했는지를 판단하기가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과거의 역사가 현재와 같은 무분별한 해적 비즈니스를 합리화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소말리아에서 해적들이 발호하게 된 상황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며, 이러한 이유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해적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소말리아의 해안이 자국의 강력하고 합법적인 통치력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소말리아의 어족 자원을 외국의 침탈로부터 보호하고 동시에 해적을 일소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말리아가 실패 국가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가까운 시일 안에 이런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해적은 앞으로도 계속 발호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소말리아 인근 해역을 움직이는 배들은 해적의 위험을 변수가 아닌 상수로 생각해야 하며, 한국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소말리아는 실패 국가의 대표이기도 하지만, '국제 정책의 무덤'이라는 딱지도 흔히 붙는다. 소말리아 내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적 노력이 모조리 실패했으며, 이제는 누구도 손대고 싶어 하지 않는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말리아가 오늘날의 지경에 이른 것은 이렇게 외국들이 섣불리 개입하려다 실패한 탓도 크다.
<포린 폴리시> 2009년 3월치에 게재된 기사는 소말리아가 왜 실패 국가가 되었는지, 이를 부채질한 측은 누구인지 잘 보여준다. 소말리아의 현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기사인데, 원문이 상당히 길어서 접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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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 소말리아
--- 소말리아는 무정부주의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다. 국제 사회의 실패한 대외 정책이 줄줄이 파묻혀 있는 무덤이나 다름없는 이 나라에서 평화가 유지된 것은 지난 20년 동안 딱 6개월 뿐이었다. 지금 이 나라의 끝없는 혼란은 주변 지역으로 확대될 위기에 놓여 있다. 그러나 세계는 그저 손 놓고 바라볼 뿐이다. ---
제프리 제틀먼 (<뉴욕 타임스> 동아프리카 지국장)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의 국제 공항에 내려 작성하는 입국 서류는 좀 색다르다. 이름과 주소를 묻는 것은 당연하지만, 특이하게도 휴대하고 있는 총기의 구경을 써 넣는 난이 있다. 내전으로 파괴된 이 도시에는 놀랍게도 아직 몇몇 항공사가 항공편을 운행하고 있다. 운항 수입은 시원치 않다. 활주로 끝에는 2007년에 격추된 러시아 수송기 잔해가 찌그러진 채 방치되어 있다.
공항을 벗어나면, 이 세상에서 폭력 갈등의 흔적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기념물들이 등장한다. 불타고 파괴되어 골격이 드러난 폐허다. 파괴된 건물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모가디슈의 이탈리아 양식 건물들은, 한때 인도양 서안의 보석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지금은 자동 화기 자국으로 성한 데가 없는 벽돌 더미에 불과하다.
소말리아는 1991년에 중앙 정부가 무너지면서 폭력 사태로 나라가 결딴나기 시작했다. 18년에 걸쳐 통일 정부를 세우려는 노력이 14차례나 기울여졌지만, 죽고 죽이는 폭력은 여전히 끊임없이 계속된다. 자살 공격, 백린탄, 참수, 중세식 투석 살해, 마약인 캇(khat)에 취해 닥치는 대로 살해하는 청소년 등, 폭력의 양상은 한계가 없다. 미제 순항 미사일까지 가끔씩 하늘에서 떨어지는 판이다. 바다에서도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폭력이 일상이 됐다. 소말리아 해적은 아덴만에서 활개치며 통행 선박들의 숨통을 조인다. 이 수로는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수로 중 하나로, 해마다 2만 척의 배들이 통과하는 곳이다. 중무장한 해적들은 2008년에 40척 이상을 납치했으며, 몸값으로 1억 달러 이상을 받아 챙겼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악명 높은 해적 발호 지역인 셈이다.
나는 지난 2년 반 동안 소말리아를 열두 번도 넘게 방문하면서, 혼란의 정의를 새로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라크의 팔루자를 뒤흔드는 반군들의 미친 듯한 분노를 바로 옆에서 지켜 보았다. 또 아프가니스탄의 산간 동굴에서 얼어붙을 정도로 춥고 괴기스러울 정도로 조용한 밤을 보낸 적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소말리아보다 더 두려운 곳은 없었다. 소말리아에서는 눈가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기 위해 잠깐 눈을 감는 동안에도 납치되거나 머리에 총을 맞을 수 있다. 매복하기 딱 좋게 수풀이 우거진 남부 키스마요의 늪지대, 곳곳에 함정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모가디슈의 미로, 아덴만의 해적들이 주리를 틀고 있는 부사소 등, 소말리아는 한 마디로 말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땅이다.
현재 이 나라는 군벌, 해적, 납치범, 폭탄 제조자, 이슬람 광신 전사, 용병,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어슬렁거리는 분노한 젊은이, 그리고 지나치게 많은 총탄으로 가득 차 있다. 소말리아에는 바그다드에 있는 것과 같은 그린 존(안전지대)이 없다. 부상을 입거나 곤경에 처했더라도 어디 피할 데가 없는 것이다. 소말리아에서는 누구나 자기가 알아서 살아 남아야 한다. 병원에 가보았자 충분한 거즈조차 제대로 구할 수 없다.
소말리아의 폭력 사태는 해적이 판치는 바다는 물론이고, 육지의 국경을 넘어서 확산되고 있다. 인접국인 케냐, 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 등에서도 소말리아의 영향을 받아 폭력과 갈등이 빈발해지는 추세다. 혼란의 수출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알 카에다와 연계를 가진 이슬람 반군들이 이 나라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이 그랬듯, 소말리아는 이슬람 전사들을 비롯한 전 세계의 싸움꾼들이 모여드는 기지가 되어 가는 중이다. 이들이 살아 남아서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면, 소말리아에서 익힌 폭력의 문화를 그대로 가져갈 것이다. 유엔의 승인을 받은 소말리아 과도정부는 4년 전에 출범할 때부터 정부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으며, 거의 붕괴될 위기에 처해 있다. 그렇게 되면 세계는 또 다른 끔찍한 구호 작전을 벌여야 할 것이다.
노련한 정치가 출신인 압둘라히 유수프 아흐메드(Abdullahi Yusuf Ahmed) 대통령은 그 동안 미국의 지지를 받아 왔으나, 누르 하산 후세인(Nur Hassan Hussein) 총리와 오랫동안 격렬히 대립한 끝에 지난 12월 사임해 버리고 말았다. 표면상의 갈등 이유는 이슬람주의자들과의 평화 협상 및 내각의 자리 몇 개를 둘러싼 의견 차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훨씬 근본적인 대립이 존재했다. 올해 초가 되자, 영토가 텍사스와 비슷한 크기인 이 나라에서 정부 통치력이 미치는 땅은 수도 모가디슈의 거리 두어 곳에 지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서 더 이상 나빠질 수도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소말리아는 예상을 깨고 더 나빠진다. 정치적 위기에 뒤이어, 수십 만 명이 굶어 죽었던 1990년대 초반의 기아 사태와 비슷한 재앙이 재연되려는 참이다. 전쟁, 피란, 가뭄, 하늘로 치솟는 식량 가격, 구호 요원들의 탈출 등, 모든 양상은 이 나라가 총체적 기아 사태로 치닫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년 5월에 나는 가뭄으로 온 세상이 타들어 가는 소말리아 중부의 한 오두막 앞에 서 있었다. 병든 남자 아이가 죽어가는 엄마 옆에 웅크리고 있었다. 엄마의 옷은 축축했으며, 겨우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그녀는 벌써 며칠째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이제 곧 죽겠군그래.” 근처에 있던 한 노인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이렇게 말하고 가 버렸다.
소말리아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해 있지만, 국제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내가 그랬듯 그저 문 앞에 서서 광란의 무정부 상태를 바라볼 뿐이다. 과거의 외부 개입은 모두 무참한 실패로 끝났으며, 따라서 어떤 나라도 다시 손을 대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미국의 개입은 최악 중 하나였다. 미군은 시기를 잘못 선택해 강력한 군벌과 맞서 싸웠으며, 맞싸우는 적과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어떤 군벌은 지원했다. 미국은 소말리아의 위기를 이끄는 두 동인, 즉 파벌 체제와 종교를 도무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 결과, 소말리아는 실패한 외교 정책들이 줄줄이 묻히는 무덤이 되었으며, 국민은 급진화되고 정정은 더욱 불안해졌다. 그 결과, 수백만 명이 굶어 죽는 위기가 초래되었다.
소말리아는 정치적으로 모순된 존재다. 겉으로는 통일 국가인 것처럼 보이지만, 수면 아래로는 깊이 분열되어 있다. 인구학적으로만 보면 소말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통합성이 높은 단일 민족 국가 중 하나다. 9백만~1천만 명에 이르는 국민 거의 모두가 한 언어를 쓰고(소말리아어), 한 종교를 믿으며(이슬람 수니파), 단일 문화에 속한 단일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소말리아를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파벌 시스템이다. 이 나라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층적 파벌로 분열되어 있다. 이 파벌 체계는 매우 복잡한 배경을 갖고 있고 끊임없이 변하므로, 외부 세력이 몇 년을 투자해 노력해도 도무지 그 속내를 알 수가 없다.
19세기 말에 이탈리아와 영국은 소말리아 땅 대부분을 나뉘어 차지했다. 그러나 서구식 법률을 이식하려는 노력은 전혀 성공하지 못했다. 분쟁이 벌어져도 법보다는 파벌 지도자들에 의해 해결되었다. 이러한 시스템을 바꾸려는 노력은 큰 저항을 받았다. ‘나를 죽여 봐라, 내 부족 전체가 복수하러 나설 것이다’라는 식이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모가디슈에서처럼 식민 행정관이 파벌 지도자들의 역할을 강제로 대치한 이탈리아 통치 지역보다는, 영국 치하의 소말리랜드처럼 부족 자치 시스템을 대체로 인정한 곳의 상황이 더 나은 듯 보였다.
소말리아는 1960년대에 독립을 이루었으나, 곧바로 냉전의 희생양이 되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가 만나는 이른바 ‘아프리카의 뿔(Horn of Africa)’에 위치한 전략적 중요성 때문이었다. 처음에 무기를 쏟아 부은 나라는 소련이었으며, 그 다음은 미국이었다. 가난하고 국민 대부분이 문맹의 유목민인 이 나라는 각종 무기로 가득 차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로 변해 갔다. 중앙 정부는 나라를 하나로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소말리아를 1969년부터 1991년까지 통치한 독재자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Mohamed Siad Barre) 준장조차 1980년대에 ‘모가디슈 시장’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국토 대부분이 이미 통제 불능 상태에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군벌들이 1991년에 마침내 시아드 바레 대통령을 밀어냈을 때,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군벌들은 정규 군대급에 해당하는 무력을 총동원해 서로를 공격하며, 항만, 비행장, 낚시터, 공중전화 부스에 이르기까지 돈이 될만한 모든 것을 놓고 싸웠다. 단 몇십 원 때문에 살인이 벌어졌다. 여성을 강간해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혼란이 계속되자, 전쟁에 기생하며 이익을 얻는 새로운 계층이 등장했다. 무기나 마약 밀수업자, 유효 기간이 지나고 변질된 분유를 거둬 수입하는 업자 따위가 그들이다. 이들은 혼란 상황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소말리아는 홉스가 말한 ‘자연 상태’, 만인이 만인에 대해 투쟁을 벌이는 바람에 삶이 피폐해지고 제 명에 죽지도 못하는 원시 상태의 현대적 구현체가 되어 갔다.
이 나라를 실패한 국가라고 부르는 것조차 지나치게 우호적인 평가라 아니할 수 없다. 콩고민주공화국은 실패한 국가다. 짐바브웨도 그렇다. 그러나 이 나라들은 최소한 정부군을 유지하고 있으며, 비록 부패하기는 했지만 정부 관료 시스템도 존재하고 있다. 1991년 이래 소말리아는 국가가 아니었다. 이 땅은 주변국과 바다 사이에 존재하는 통치 부재의 무법 천지라고 불러야 옳다.
1992년에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해병대 수천 명을 소말리아에 파견해 원조 식량을 지키게 했다. 이 작전은 미국이 냉전 이후 ‘신 국제 질서’를 시작하는 첫 사례였다. 경쟁자와 씨름할 필요 없는 유일 강대국이 된 미국은 세계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새롭고도 도덕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고 많은 사람이 기대했다. 그러나 소말리아는 첫 작업 치고는 매우 나쁜 사례였음이 곧 드러났다. 부시 대통령과 참모들은 소말리아의 파벌 구조를 잘못 읽었으며, 소말리아인이 파벌 지도자에게 얼마나 열렬히 충성하는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소말리아 사회는 파벌 안에 분쟁이 벌어지면 자잘히 분열되기도 하지만, 외부의 적이 등장하면 급속히 단결하는 양상을 띤다. 미국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이러한 교훈을 배웠다. 당시 군벌 무하마드 파라 아이디드(Mohammed Farah Aidid)를 강제 체포하려던 작전이 그것이다. 이 시도는 1993년 10월에 벌어진 악명 높은 ‘블랙 호크 다운’ 사건으로 끝났다. 작전이 시작되자 소말리아 민병 수천 명이 슬리퍼를 끌며 로켓 발사기를 메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블랙 호크 헬리콥터 두 대를 격추시키고 미군 18명을 사살했으며, 승리감에 도취해 시체를 끌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이것은 미국이 소말리아에서 겪은 첫 번째 실패였다.
치욕을 당한 미국은 소말리아를 빠져 나왔으며, 소말리아는 그 자신의 지옥과 같은 시스템에 맡겨졌다. 다음 10여 년 동안 서구 국가는 소말리아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아랍 조직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으로 이슬람 수니파의 강력한 분파인 와하비파를 추종하는 그룹들이 조용히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슬람 사원과 코란 학교를 비롯한 사회 시설을 건설하면서, 이슬람 부흥을 시도했다. 2000년대 초에 이르면 모가디슈의 부족 지도자들은, 비록 느슨하나마 지역 재판소 체제를 갖추고 최소한의 질서 유지를 모색하게 된다. 이러한 조처는 이 도시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었다. 이런 사법 시스템을 통해 도둑과 살인자들이 체포되고 구금된 뒤 재판을 받았다. 각양각색의 부족들이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유할 수 있었던 가치는 이슬람 율법(샤리아)이었다. 소말리아의 장로들이 연대해 만든 조직은 ‘이슬람법정연합’라는 이름을 달았다.
모가디슈의 장사꾼들도 사업 기회를 포착하기 시작했다. 소말리아에는 군벌과 재벌이 있다. 군벌은 이 나라를 갈갈이 찢었지만, 대기업 소유자들인 재벌은 이 나라를 하나로 지탱하는 역할을 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정부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 재벌들이 담당했기 때문이다. 보건 의료, 학교 교육, 발전소, 사설 우편 서비스 등이었는데, 물론 톡톡히 이윤이 남는 사업들이었다. 재벌의 역할이 얼마나 컸던가는, 이들이 나라의 통화 정책에까지 관여했다는 점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들 덕택에, 중앙 은행이 없던 1990년대의 소말리아 실링화는 정부가 존재하던 1980년대보다 더욱 안정되었다. 그러나 소말리아에서의 사업은 위험도가 매우 높았다. 정치 상황이 불안한데다, 언제라도 사업체를 강탈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이슬람이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세금 없이도 치안을 제공했고, 정부 없이도 행정 서비스를 제공했다. 재벌들도 이슬람에서 살 길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2005년에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소말리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평가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상황을 제대로 읽는 데 실패했으며, 이는 미국이 소말리아에서 겪은 두 번째 실패로 귀착되었다.
9/11 이후의 세상에서 소말리아는 테러범 소굴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우려되었다. 1990년대에 알 카에다가 아프가니스탄에 자리를 잡고 서구를 대상으로 한 전쟁을 기획했듯이, 소말리아도 지하드 조직이 성장하는 모태가 될 수 있다는 우려였다. 당시 이러한 우려를 정당화할 만한 어떠한 실제 움직임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일부 군사 전문가들은, 소말리아의 혼란상이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기 때문에 알 카에다조차 제대로 활동하지 못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대체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는 것은 테러리스트에게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이슬람주의자들을 손쉽게 박멸할 전략을 고안해 냈다. CIA 요원들은 수년 동안 소말리아 국민을 착취해 온 군벌들을 지원해, 사회 체제를 세워 나가던 이슬람 세력과 싸우도록 부추기기 시작했다. 2008년에 내가 만난 소말리아 한 군벌에 따르면, 제임스와 데이빗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미국 요원이 현금이 가득 찬 가방을 들고 모가디슈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군벌을 만난 요원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돈으로 무기를 사시오. 질문 사항이 있으면 이메일로 연락하시오. 군벌이 내게 보여준 그들의 이메일 주소는 다음과 같았다: no_email_today@yahoo.com.
이러한 작전은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았다. 소말리아인은 말하길 좋아한다. 기이하게도, 이 나라의 휴대폰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값싸고 품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미국이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군벌을 지원해 이슬람주의자들과 싸우게 한다는 소문은 신속히 퍼졌다. 그 결과 이슬람주의자들의 인기는 더욱 더 치솟았다. 2006년 6월에 이슬람주의자들은 모가디슈에서 마지막 군벌을 내쫓았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 혼란의 도시가 제대로 통치되는 듯한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2006년 9월에 모가디슈를 방문했을 때, 나는 청소부들이 거리를 치우고 어린이들이 해변에서 수영하며 노는 모습을 보았다. 밤에는 총성이 나지 않았는데, 이는 몇 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반목하는 파벌 지도자들을 이슬람의 기치 아래 단결시켰으며, 이들의 도움을 받아 주민 상당수의 무장을 해제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역시 파벌과의 연계를 활용해, 항만 어촌들이 해적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설득함으로써 해적의 활동도 크게 축소시켰다. 이러한 설득 작업이 먹히지 않으면, 이슬람주의자들은 해적이 강탈한 배로 직접 쳐들어 갔다. 런던에 있는 국제해사국(International Maritime Bureau)에 따르면, 2006년에 소말리아 해안에서 발생한 해적 공격은 10건에 불과했다. 이는 지난 10년 기간 중 최저 발생 건수다.
이슬람주의자들이 이룩한 6개월의 평화는 소말리아가 1991년 이래 안정을 맛본 유일한 기간이다. 그러나 군벌들을 타도하기 위해 함께 힘을 합치는 것과 그 다음에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곧 이슬람 온건파와 지하드를 지지하는 극단주의자 사이에 불화가 발생했다. 가장 급진적인 분파 중 하나는 군벌 연합체인 샤바브(Shabab)로, 이슬람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그룹이었다. 이들은 검은 색 대형 트럭을 타고 모가디슈 시내를 돌아다니다, 발목이 보이는 여성이 있으면 구타했다.
다른 이슬람 전사들조차 샤바브를 두려워 했다. 2006년 12월경이 되자, 주민 중 일부는 샤바브가 경미한 환각 작용을 하는 식물 캇을 금지한 데 대해 불만을 표하기 시작했다. 캇은 소말리아 주민들이 껌처럼 씹고 다닐 정도로 애용하는 식물 잎사귀였다. 샤바브 지도부가 외부의 성전주의자들과 함께 일한다는 소문도 널리 퍼졌다. 여기에는 수배된 알 카에다 테러리스트도 포함되었다. 결국 미국 국무부는 샤바브를 테러 조직으로 분류했다. 미국 관리들은 1998년에 케냐와 탄자니아에서 벌어진 미국 대사관 공격을 주도한 테러리스트들이 샤바브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소말리아가 실제로 몇몇 요주의 인물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했을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이 지금 염려하는 것처럼 테러리스트의 온상이 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2006년 당시에는 이슬람 온건파를 샤바브와 같은 극단주의자들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했다. 실제로 일부 미국 관리는 이러한 가능성을 놓고 노력을 기울였다. 민주당 소속 하원의원으로 하원 아프리카소위원회 의장이던 도널드 M. 페인(Donald M. Payne)도 그 중 하나다. 페인과 같은 인사들은 이슬람 온건파와 만나, 과도정부와 협상하며 권력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다시 총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미국 자신이 직접 들어가 싸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 대규모 군대를 소말리아에 파견하는 것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대타를 집어 넣었다. 에티오피아 군대가 그 대타였다. 이 정책은 미국이 소말리아에서 저지른 세 번째 실수였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미국 최고의 우방국 중 하나다. 이 나라는 이슬람 극단주의가 판치는 이 지역에서 기독교의 보루 노릇을 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각인시켜 왔다. 에티오피아 지도자들은 부시 행정부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하는지 알아채고, 바로 그 말을 해 주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곧 테러리스트이며, 가만 놔 두었다가는 지역 전체에 위협이 될 뿐 아니라, 바로 옆의 케냐에 몰려 오는 미국인 관광객까지 희생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물론 에티오피아는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에티오피아는 기독교 지도부가 통치하는 나라지만, 국민 절반 가까이는 이슬람교도다. 이 나라에서 이슬람이 물밀듯 일어나는 것은 시간 문제다. 게다가, 이 나라 정부는 몇몇 반군 조직과 싸우고 있는데, 그 중 강력한 하나는 소말리아 출신 반군 그룹이다. 에티오피아 정부는 소말리아 이슬람주의자들이 바로 코 앞에 교두보를 건설할까봐 두려워했다. 또 그들이 에티오피아의 철천지 원수인 에리트레아와 손을 잡는 것도 우려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이 우려는 현실화되었지만 말이다.
에티오피아를 지렛대로 삼아 소말리아에 개입하는 정책에 워싱턴의 모든 관료가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에티오피아는 끔찍한 인권 탄압으로 악명이 자자하며, 그 군대는 미국 고문단의 인권 보호 교육에도 불구하고, 자국민을 잔인하게 학대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2006년 12월에 미국은 에티오피아와 은밀한 교감을 주고받은 끝에, 소말리아를 공격해도 좋다는 사인을 보냈다. 에티오피아 군대 수천 명은 국경을 넘어 소말리아로 쳐들어 갔으며, 몇 달 동안 소말리아 내부에 잠입해 있던 병력도 본색을 드러냈다. 이들은 단 1주일 안에 소말리아 이슬람 군대를 패퇴시켰다. 에티오피아 군대 내부에는 미군 특수전 병력도 들어가 있었으며, 미국은 이슬람 지도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몇 차례의 공습을 가하기도 했다. 또 테러리스트 용의자를 목표로 하여 미사일을 지속적으로 발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 대부분은 테러 용의자가 아니라 민간인을 살상했으며, 가뜩이나 들끓던 반미 감정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지하로 잠적했으며, 과도정부는 모가디슈를 되찾았다. 환호보다는 야유가 더 크게 나왔다. 반군들은 며칠도 지나지 않아서 활동을 재개했다. 과도정부는 군벌 출신들의 패거리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이는 대체로 사실이었다. 이 작전은 1991년 이래 소말리아에 중앙 정부를 세우려는 14번째 시도였다. 그 전의 시도는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정부가 제 역할을 못하고 혼란이 계속되면 무기상들은 계속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따라서, 정부를 비난하는 세력 중 일부는 정부를 흔들기에 여념이 없는 전쟁 상인들이었다.
그러나 비난 대부분은 과도정부가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안 할 일을 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상황은 시작부터 빗나갔다. 정부 지도자들은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보다, 누가 어떤 직위를 차지하냐를 놓고 다툼을 벌이는 데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부는 모가디슈에서 반군을 일소하려 했는데, 이 때문에 주요 파벌의 지지를 즉시 잃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에티오피아를 등에 업고 있다는 점도 반감을 샀다.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는 분쟁 지역인 오가덴의 점유를 놓고 몇 차례 전쟁을 치른 바 있다. 이 지역 주민은 소말리아인이 다수인데도, 현재 에티오피아가 차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에티오피아와 협력하는 것은 일종의 매국 행위로 간주되는 상황이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이러한 국민 정서를 읽고, 자기들이 진정한 소말리아 민족주의자임을 강조하며 나섰다. 이들은 다시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거리는 이슬람 반군과 에티오피아 병력 간의 치열한 시가전으로 인해 다시 폐허로 변했으며, 이 과정에서 시민 수천 명이 희생됐다. 에티오피아군은 한 지역을 공격할 때,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고 통째로 날려버렸다. 이러한 작전 스타일 때문에 유럽연합이 전쟁 범죄 행위를 조사하러 나설 정도였다. 유엔에 따르면, 이들은 인간을 글자 그대로 녹여 버리는 백린탄까지 사용했다.
모가디슈 시민 수십 만이 도시를 탈출했지만, 이들이 갈 곳은 질병과 증오가 지배하고 있는 난민 캠프밖에 없었다. 죽음은 과거 어느 때보다 무차별적이고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내가 모가디슈에서 만난 한 남자는, 자신과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던 아내가 갑자기 날아온 박격포 유탄에 맞아 반토막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또 다른 남자는 총격전이 벌어지던 지역을 지나다 다리에 총을 맞았는데, 격렬한 난사가 그치지 않아서 7일 동안 풀만 뜯어 먹으며 기다리다가 가까스로 기어 나왔다.
소말리아는 언론인이 취재하기에도 극히 위험한 곳이다. 현재 소말리아를 찾는 외국 기자는 거의 없다. 언제든 간단히 납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케냐의 유엔 관련 기관에 근무하고 있는 내 친구들은, 용병을 고용하지 않은 채 소말리아에 들어가면, 납치되어 낡은 토요타 차 구석에 처박히거나 총알을 맞을 가능성이 100%라고 강조한다. 현재 나는 소말리아에 취재를 하러 갈 때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무장 경호원 10명을 고용한다.
올해 1월이 되자, 소말리아 과도정부의 통치력이 미치는 땅은 모가디슈의 정부 청사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그나마 아프리카연합의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어 수비를 해 주는 덕분이다. 에티오피아군이 모가디슈를 빠져나가자마자, 공백 상태가 된 권력을 차지하려는 다양한 이슬람 분파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슬람 반군이 이 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바이도아를 정부로부터 탈환하고 샤리아 율법을 이식하는 데에는 며칠도 걸리지 않았다.
샤바브의 인기는 여전히 별로지만, 이들은 힘이 있다. 샤바브는 수백의 정예 전사들과 수천의 병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잘 훈련되었으며 결연한 의지를 지닌 병력을 갖추고 있다. 1월 말에 비교적 온건한 이슬람 지도자가 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폭력 사태가 줄어들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새로 뽑힌 대통령은 2006년에 이슬람법정연합의 지도자를 지낸 인사였다.
앞으로 샤바브가 이 나라의 통치권을 장악한다면, 그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전투로 단련된 병사들을 찌그러진 픽업 트럭에 태워서 에티오피아, 케냐, 심지어 지부티까지 진출시켜, 이 나라들에 있는 소말리아족 거주 지역을 탈환하려 할지도 모른다. 이 시나리오는 범소말리아를 꿈꾸는 이들이 오래 전부터 주장해 온 신기루 같은 이상이다. 이러한 목표를 현실적으로 추구한다면, 소말리아 국내 갈등은 곧 국제 분쟁으로 확대되며, 주변국과 그 동맹국들이 모두 수렁으로 빠져들 것이다.
샤바브는 또 테러리스트를 풀어, 소말리아의 비종교 정파나 그들을 지원하는 미국 등의 배후 세력을 공격하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태는 이미 매우 불안정한 상태인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 큰 충격을 가져올 것이며, 또 다른 갈등을 촉발시킬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는 1990년대 말에 국경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으로 10만 명 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두 나라는 지금도 양국 국경 지대에 중무장한 병력을 배치하고 있다. 에리트레아의 지지를 받는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샤바브가 소말리아를 장악하게 되면,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간에 두 번째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이렇게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린다면, 이 지역 전체 수백만 주민이 피난에 나서야 하며, 식량 생산은 불가능해지고, 폭력 사태의 와중에 외국의 원조 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쉽게 말해, 가뜩이나 고통을 겪는 지역에서 또다시 최악의 기아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현재 소말리아에서는 이런 최악의 사태가 벌이지지 않도록 할 뾰족한 방도가 없다. 갈등을 해결하는 지역 시스템을 활용해, 권력이 분권화된 사회로 이끄는 것이 최선의 방안이라 할 수 있다. 공공 질서의 기초를 각 마을에 존재하는 지역 파벌에게 맡기는 것이다. 이렇게 자잘한 자치 시스템이 모이면 지방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 마지막 단계는 각각의 지방 정부를 연합해 느슨한 연방 국가를 구성하고, 통화나 해적 대책 같은 국가적 문제를 다루도록 한다. 이 때에도 지방 지도자들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아직 과도정부가 존재하고 있으므로, 때를 놓치지 말고 온건한 이슬람주의자들이 과도정부에 참여시켜야 한다. 서구 세력은 이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좋든 싫든, 많은 소말리아인은 이슬람 통치를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샤바브가 강제하는 방식의 강력한 규제는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샤바브 치하의 이슬람 재판정은, 성폭행을 당한 10대 소녀에게 간통의 누명을 씌워 투석으로 처형한 적도 있다. 그러나 적절한 이슬람 통치에 대한 우호적인 정서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정서가 테러리스트에 대한 지원으로 오해되면 안 된다.
좀더 급진적인 해결책도 있다. 유엔이 소말리아의 통치권을 넘겨 받은 뒤, 동티모르와 같은 방식을 강제함으로써 행정력을 수립하는 것이다. 소말리아는 이미 독립한 국가이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은 소말리아 국민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러한 방안을 적용하려면, 유엔은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파벌 지도자에게 권한의 상당 부분을 위임해야 한다. 어떤 방안을 선택하든, 분명한 것은 외부의 외교관들이 군벌보다는 재벌과 협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소말리아 문제는 따로 있다. 18년간 혼란을 겪는 동안 수많은 사람이 죽고 수많은 실력자가 등장했다 사라진 이 나라는, 도대체 실권자가 누구인지를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사람이 있는가조차 알 수 없다. 재건되어야 할 것은 풍비박산 난 모가디슈 거리의 건물들만이 아니다. 국가 전체의 정서가 말할 수 없이 황폐해 있으며, 전국민이 극심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상태다. 소말리아 국민은 그 동안 안전을 위해 의지해 왔던 파벌 이기주의를 벗어나, 하나의 나라라는 관념을 새로 체화해야 한다.
소말리아는 기로에 서 있다. 현재 거의 모든 국민은 정부란 게 대체 뭔지, 그게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다. 이렇게 초점을 잃고 방황하는 국민은 소말리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손에 칼라슈니코프 총을 들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총탄 자국이 즐비한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게 이들의 생활이다. 이들에게 법과 질서란 완전히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들의 땅을 지배하는 유일한 법은 자동 소총이다. (끝)
※ 모가디슈 사진: 본문에 링크, 지도: 위키, 도표: <포린 폴리시>, 기사 저작권: <포린 폴리시> 및 포린폴리시코리아 (원문: Gettleman, J. (2009). The most dangerous place in the world. Foreign Policy, March/April 2009.)